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화가
출생: 1445
사망: 1510.5.17
본명: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 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직업: 예술
예술양식: 고전적 · 신화적 주제, 알레고리적 인물상, 뚜렷한 선원근법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대표작품
《비너스의 탄생》(1486년), 《수태고지》(1489년), 《신비의 강탄(降誕)》(1501년), 동방박사의 경배, Fortitude,
〈봄〉 (1482년), 〈찬가의 성모〉(Madonna of the Magnificat, 1481년) ,〈성모 마돈나〉 (1481년)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생애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문화어: 싼 드로 보띠첼리, 1445년 3월 1일 ~ 1510년 5월 17일)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주로 피렌체의 공방에서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역사, 신화, 종교 작품과 초상화를 제작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초청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 제작에도 참여했다.
보티첼리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이지만, "작은 술통"이라는 뜻을 가진 보티첼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메디치 가문과 그 가문의 추종자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의 초상화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티첼리의 후기 작품은 고딕 양식을 재수용하면서 감정적으로 강한 표현을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보티첼리의 회화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요소를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재수용했고, 유겐트슈틸도 선과 장식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그로부터 몇 가지를 차용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인 마리아노 디 반니(Mariano di Vanni)는 제혁업자이다.
보티첼리의 그림은 처음에는 필리포 리피에게 그림을 배운 듯하며, 이어 베로키오와 폴라이월로로부터 사실주의를 배웠다. 초기에는 《포르테차》 《유딧과 홀로페르네스》(1470, 우피치미술관 소장)와 《성(聖) 세바스찬》(1474,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 등에서 자연연구에 대한 소박한 정열을 보이는데, 그 미묘한 곡선과 감상적인 시정(詩情)에 일찍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나타나 있다. 그 후 메디치가(家)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학자·시인들의 고전(古典) 부흥의 분위기와 신(新) 플라톤주의의 정신에 접하고, 특히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시에 고취되어 그린 《프리마베라(봄)》(1477∼1478, 우피치미술관 소장)는 시적(詩的) 정신과 자연연구의 아름다운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1478년 메디치가에 대한 파치 음모사건의 범죄자가 처형되는 벽화제작을 위촉받아 그린 것은 카스타뇨의 알비치 음모자 처형도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나, 그때의 벽화는 훼손되어 그 진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1480년 온니산티성당에 그린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벽화를 보게 되면, 카스타뇨의 엄격한 리얼리즘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카스타뇨의 영향도 일시적인 것으로 1481년에는 산마르티노성당에 감미로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그리고, 감상적인 《마니피카토의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와 《책의 성모》(밀라노의 푸르디 페초리미술관 소장)도 이 무렵의 작품이라고 한다.
또 1481년부터 1482년까지는 기를란다요, 페루 지니 등과 함께 교황 시크스투스 4세의 부름으로, 보티첼리가 총감독이 되어 바티칸궁전 시스티나예배당의 측벽(側壁) 장식을 맡았다. 1482년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로마에서의 일로 자신을 얻어, 그 후 약 10년 동안은 점차 사실(寫實)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화경(畵境)을 열었으며, 가장 충실한 원숙 기를 전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성모자(聖母子)와 두 성(聖) 요한》(1485,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비너스와 마르스》(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토르나브 오니 렌미가(家)의 별장에서 나온 벽화》(루브르미술관 소장)를 비롯하여 《비너스의 탄생》 《메라그라나의 성모》(1487) 《산바르나바의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양식화된 표현과 곡선의 묘미를 구사하여, 장식적 구도 속에 시적 세계를 표현한 걸작이다. 그러나 그 후의 대표적인 작품을 보면, 《수태고지》(1489) 《성모대관(聖母戴冠)》(1490, 우피치미술관 소장)처럼 차차 신비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1491년에 도미니크회의 영걸(英傑)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성마르코수도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메디치가의 이교주의적 정책과 피렌체의 퇴폐적 세태를 격렬한 예언자적 설교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보티첼리는 그 설교에 매혹되어 신비적인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단테의 《신곡(神曲)》의 삽화에 열중하여, 조형(造形) 예술가로서는 자멸의 길을 밟았다.
1498년 사보나롤라가 순교하자 보티첼리는 그의 슬픈 추종자로서 예언자적 신비주의로 변모하였으며, 1501년 제작한 《신비의 강탄(降誕)》(런던 내셔널갤러러 소장)이나 《신비의 십자가》(미국 케임브리지 포그미술관 소장)와 같은 신비적 환상으로 가득 찬 작품을 그렸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의 설치장소를 심의하는 위원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출석하였으나, 그 후 그는 제작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소식마저 끊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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