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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명화와 예술가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by 반짝MD 202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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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요약 러시아 태생의 화가.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출생: 1866.12.16

사망:1944.12.13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회화

Composition VII, 원속의원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의  대표저서 및 작품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1911), 《점 ·선 ·면 Point and Line to Plane》(1926)
《즉흥 26 Improvisation 26》(1912), 《교회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Church》(1913), 《구성 218 Composition No. 218》(1919), 《구성 8 Composition VIII》(1923), 《하늘색 Sky Blue》(1940)
 《즉흥 26 Improvisation 26》(1912), 《교회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Church》(1913), 《구성 218 Composition No. 218》(1919), 《구성 8 Composition VIII》(1923), 《부드러운 상승 Gentle Ascent》(1934), 《하늘색 Sky Blue》(1940) 등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의 생애

칸딘스키 러시아의 화가, 판화제작자, 예술이론가이다. 마티스, 피카소와 비교되며 20세기의 중요한 예술가 중 하나로 평가되는 그는 초기 추상미술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최초의 현대추상작품을 그린 작가로 평가된다.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화가이기 전 먼저,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칸딘스키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칸딘스키 1896년 독일로 건너가 아즈베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900년에 뮌헨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 사사하며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동료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를 만나게 되었다.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 전시협회 및 미술학교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를 만나 이후 몇 년 동안 그녀와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함께 작품 활동을 했다. 1908년 무르나우로 거처를 옮긴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다. 초기에 그는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들을 그렸으나,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음악과 철학, 근대미술과 추상작업에 대한 사상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그는 캔버스를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점과 색띠로 뒤덮음으로써 추상을 탐험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은 그림이 될 수 있고, 그림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칸딘스키는 1911년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했다. 그의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는 청기사파 그룹 탄생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2년 동안 이 그룹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민족 계몽을 위한 위원회의 회화분과에서 활동하는 한편, 모스크바 아트워크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구성주의에 대해 연구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왔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수학적으로 제한된 엄격한 형태가 지배하게 되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원은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색채 사용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는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하자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프랑스 뇌이쉬르센에서 78년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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