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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명화와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by 반짝MD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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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이탈리아의 조각가·건축가. 르네상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거장이다.
이탈리아의 대표 천재화가, 조각가로 불린다.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피에타》,《다비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등이 대표작이다.

'볼테라'가 분필로 그린 미켈란젤로의 초상화


출생: 1475.3.6
사망: 1564.2.18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
출생지: 이탈리아 카프레세

주요 작품
《다비드》(1504)
성 가족(도니 톤도) (1503 - 1506년경)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1508년 - 1512년)
최후의 심판 (1534년 - 1541년)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이탈리아어: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로마와 피렌체 등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로 대표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여,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1491)에게로 옮겨 14세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미켈란 젤로가 돔을 디자인한 성바오로 성당


1550년 바티칸 파올리나 예배당의 프레스코 벽화 <바오로의 회심>(1549년)과 <십자가의 베드로>(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 그림)를 완성했다.
1550년대 이후 미켈란젤로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열두 점의 드로잉을 남기게 된다.
이는 그의 만년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 등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564년 89세를 일기로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유명한 일화도 로렌초 일 마니 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을 하게 되었고,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할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에,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 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 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聖母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는데,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畵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模寫畵)가 남아 있을 뿐이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天障畵)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5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 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 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513∼15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彫像)이 될 《모세 Moses》의 거상(巨像)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1542년의 제5회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脇侍)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廟墓)의 제작을 의뢰받아, 15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寓意像), 그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構圖)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추이(推移)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公) 미망인 비토리아 코로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磔刑)》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팔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Pieta》의 군상을 3체(體)(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 대한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家)나 교황에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은 모두 이러한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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