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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명화와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by 반짝MD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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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출생 : 1452
사망: 1519년
국적: 이탈리아
직업: 화가, 기술자, 천문학자, 철학자, 해부학자, 수학자, 조각가, 박식가, 건축가, 토목 공학자, 외교관, 발명가, 작곡가, 음악가, 물리학자, 생리학자, 식물학자, 화학자, 동물학자, 풍자화가, 과학자, 제도사, 디자이너, 작가

스승: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요안니스 아르기로풀로스,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
제자: 자코포 다 폰토르모, Barthemely d'Francesco Melzi, Andrea Solari, Cesare da Sesto, Salaì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서명, 싸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대표작품

<모나리자>,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생애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이탈리아어: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polymath)이다. 르네상스의 대표 거장이라고 불린다.
또한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수학자,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로도 천재성이 두각 되었다.

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차지한 인물이다. 네이처는 과학 전문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자를 1위에 뽑을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으며 2위는 지배계급인 주인공이 인간적인 결함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이어받은 극작가인 셰익스피어였고,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간신히 6위를 차지했다.

르네상스형 만능인인 즉 라틴어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Homo universalis, homo=사람, Universalis=모든(Universalus)에 -is 격 어미를 붙인 속격조사=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능력이 많은 사람)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생각이 자유롭고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평가된 것이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 즉 과학기술과 예술을 통합하려는, 자신만의 생각을 끊임없이 하였다.

그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이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의 수태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에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Vinci)에서 태어났다.
다빈치의 태어난 시간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공증인이었던 그의 조부 안토니오의 직업적인 습관 때문이다.
그의 조부는 중요한 일들을 공증문서 노트 뒷 여백에 기록해 두곤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피에로 다 빈치(Piero da Vinci)는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으로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혼외자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의 나이 23살로 결혼 전이었으나 생모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고 지참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아버지 피에로는 수차례 재혼하였고 이때 아이를 많이 낳은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두 12명이나 되는 이복형제가 생겼다.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1504년 아버지 피에르가 77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 이복형제들은 합심해서 음모를 꾸며, 다빈치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한 푼도 나눠주지 않았다. 또한 훗날 숙부 프란체스코가 사망한 후에는 상속문제를 두고 이복형제들과 민사소송을 치루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혼외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차별과 무시는 존재하여 귀족 가문의 혼외자가 아닌 경우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의사, 약사, 법률가, 행정 공무원이 될 수 없는 등 직업 선택의 폭도 제한적이었다.

부친이 속한 길드(조합)에서도 혼외자가 행정관리나 공증인이 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정식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고, 비공식적으로 모어이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을 뿐이며 당대 귀족이나 식자층의 자녀들처럼 지식인들이 쓰는 언어들인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다만 피렌체의 인문주의 학자들로부터 무시가 이어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웠고, 그 당시 라틴어를 연습했던 기록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최후의 만찬〉(1495 ~ 1498,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Da_Vinci_Vitruve_Luc_Viatour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 모나리자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1 피렌체 시대의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1 밀라노 시대의 레오나르도는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제2 피렌체 시대,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제2 밀라노 시대,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앙부아즈 시대의 다비치는, 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간 피렌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 해 전인 1512년 9월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 정부를 와해시키고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1479~1516)가 맡았고 그의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있었다.

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다.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의 사이가 소원하던 차에 후원자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로마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다빈치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세스코 멸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Clos Lucé)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다빈치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 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갔는데 프랑스에서 <성 안 나와 성모자>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이때 이미 중풍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었으나 그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 밖의 업적으로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써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활발하게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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